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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키북 10 - 접힌 도안집을 펴다

어머니는 수예와 관련한 사업을 하셨다.요즘으로 말하면 수예품의 반제품, 키트를 준비하여 납품 하는 사업으로, 집이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시장 같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을 수 없던 시절이라 일본에서 들어온 수예 잡지와 도안집은 중요한 아이디어의 원천이었다. 그 가운데는 1962년에 발행된 부록도 남아 있다. 대부분은 출판연도가 없지만, 적어도 6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온 종이들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 종이들을 보며 자랐다.어머니에게는 작업의 참고서였지만, 내게는 너무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종이들은 내 감각의 한쪽을 오래도록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훼손하는 것이 아까워서 스캔을 해 두려고 했다.하지만 스캔은 정리가 아니라 또 하나의 복제를..

청키북 009 - 어머니의 악보 파일

모듈 009는 어머니의 악보 파일에서 시작한다 책 꽂이에, 분류 미정이었던 오래된 파일 하나를 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합창단에서 사용하시던 악보다.두툼한 파일은 천을 가늘게 찢은 끈으로 묶여 있었다. 틀림 없는 어머니의 습관이다. 한 겹의 파일을 열어 보니 안 쪽에 다시 한 번 천쪼가리 끈으로 묶여 있고 어머니의 글이 제일 앞에 보였다.파일을 한 장씩 펼쳐 보니 가장 오래된 날짜는 1994년이었고, 2001년 비엔나 합창제 일정표 등이 함께 들어 있었다. 합창을 시작하시면서 부터 해외로 열심히 다니셨다.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정신 없을 때 어머니는 비로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 하셨을까? 한 권의 파일 안에 여러 해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악보들과 함께 간혹 손글씨들이 보인..

청키북 008 - 스케치북의 두 번째 역할

모듈 008은 오래된 스케치북에서 시작한다. 어린이 책에 삽화를 그리던 시절의 흔적이 보여 반가웠다. 책꽂이에 한 권 남아 있는 책을 보니 1993년에 출판되었다. 그보다 먼저 그렸을 테니 30년이 넘는 시간을 버텨 준 녀석이다. 이번 청키북 작업에 과감히 접어 넣어 보려 했지만, 아직은 아쉬움이 남았다. 나중에 얼굴을 하나씩 오려 내지를 꾸미는 재료로 쓰기로 하고, 대신 스케치북의 표지만 잘라 새 표지로 사용했다. 다행히 그 무렵 구입했던 같은 스케치북이 몇 권 더 남아 있다. 패턴 작업을 하며 크기와 비율을 확인하기 위해 출력했던 프린트도 넣었고, 붓을 닦거나 색과 무늬를 장난처럼 시험했던 종이들도 몇 장 더했다. 언제인지 제주 여행을 다녀오며 작은아이가 사다 준 과자 상자는 ..

청키북 007 - 패턴 연습의 흔적

일곱 번째 청키북 모듈은 오래전 구입했던 패턴 드로잉 워크북 한 권에서 시작한다. 당시에는 이 패턴을 응용해 수업을 진행해 보기도 했다. 작은 패턴을 반복하며 그림을 채워 가는 방식이 흥미로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작업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펜으로 작은 면적을 오래 채우다 보니 자세가 무너지고 몸에 무리가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 더 굵은 매직을 사용하거나, 큰 화면에 자유롭게 응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워크북은 생각보다 종이가 거칠었고, 이미 내게는 충분한 참고 자료가 쌓여 있다. 오래 보관만 하던 책이었기에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한 장 한 장 분해했고 워크북의 표지를 사이즈로 잘라 청키북의 표지로 쓰기로 했다. 이번 청키북에는 완..

청키북 006 - 작업실의 지난 모습

여섯 번째 청키북 모듈은 여전히 오랜 시간 창고에 묵히던 상자들을 정리하며 만들어졌다. 상자를 하나씩 열다 보니 예전에 열었던 개인전 리플렛과 민화 작업 사진, 출력해 두었던 이미지들, 그리고 한동안 받아보던 작은 월간지가 함께 나왔다. 잊고 있었는데 종이들은 묵묵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그 무렵에는 아주 큰 그림을 그렸지만 지금은 사진 몇 장과 리플렛만이 그 시간을 대신하고 있다. 한 장을 접어 만든 리플렛을 다시 펼쳐 보았다. 그림보다 먼저 읽힌 것은 글이었다. 분명 내가 쓴 글인데도 처음 읽는 것처럼 낯설고 부끄럽다. 하지만 몇 줄 읽다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쓰던 언어와 바라보는 방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자라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출력해 두었던 종이..

청키북 005 - 접어 두었던 세상을 펼치다

다섯 번째 청키북 모듈은 오래된 지도들로 만들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작업실 한쪽 상자에는 오래전부터 모아 둔 지도들이 남아 있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부록으로 받았던 세계지도와 중국 지도, 아메리카 지도, 그리고 여러 나라를 소개하던 화보들이다. 펼쳐보니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바닥에 늘어놓고 보니 이불처럼 넓게 펼쳐질 정도였다. 어떤 것은 1982년에 제작된 지도였고, 어떤 것은 국가와 지역을 소개하는 특집 부록이었다. 사실 정보로만 보면 이미 오래전에 역할을 끝낸 종이들이다. 국경도 달라졌고, 나라 이름도 바뀌었다. 인터넷을 켜면 훨씬 정확한 지도를 몇 초 만에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버리지 못한 이유를 이번에야 조금 알 것 같았다.젊은 시절 영화 워터월드를 보았던 기억 때문이다.영화..

청키북 004 - 작업실에서 살아남은 종이들

네 번째 청키북 모듈은 복사지와 캔트지로 만들어졌다.다른 작가의 작품을 참고하기 위해 복사해 두었던 자료들, 언젠가 작업에 사용하려고 출력해 두었던 인쇄물들, 그리고 스케치북 사이에 끼어 있던 오래된 낙서들이다. 처음에는 그저 종이 뭉치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하나씩 꺼내다 보니 작업실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종이들이었다.어떤 것은 참고용으로 복사해 두고 사용하지 못한 자료였고, 어떤 것은 작업을 위해 출력해 두었다가 잊혀진 종이였다. 당시에는 꼭 필요할 것 같았지만 결국 다른 길로 가게 되면서 남겨진 흔적들이다. 당시에 나의 견문이 짧은 것도 있지만 책이 귀했다. 누군가 중국에 갔다가 사온거라 하면 한국에서는 못 구한다는 뜻으로 알고 주변의 몇명이 책을 빌려 복사하여 자료로 사용하였다. 또 누가 ..

청키북 003 - 격동의 80년대를 기웃거렸던 흔적

청키북은 오래된 종이를 버리지 않는 방법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다시 사용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세 번째 청키북 모듈은 오래된 미술 자료들로 만들어졌다.1980년대 후반에 받아 두었던 전시 팸플릿과 도록, 졸업전 자료들이다. 여기저기 끼워 놓았던 것들인데, 잦은 이사에도 흩어지지 않고 여기까지 따라온 것들이다. 오랜만에 펼쳐보니 종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당시의 표현들이었다.지금 읽으니 서투르지만 가슴이 뜨거워지는 문장들.시대와 역사, 민족과 현실을 이야기하던 시절이었다. 젊은 나 역시 미술 주변을 기웃거리며 전시를 보고, 자료를 모으고, 당시를 배워나갔던 때였다. 청키북을 만들기 시작한 이상 자료들은 이제부터 재료가 된다.40년을 접혀 있었는데 이제는 펼쳐서 빛 보게 하고 숨 쉬게 하..

청키 북 002 - 쌀 푸대, 버리지 말고 한 번 더 볼까?

청키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버리는 '분류 전'의 물건들이 줄을 서고 있다.이번에는 쌀푸대를 꿰매 작은 책을 만들었다.처음에는 포장재에 불과했던 쌀푸대가 접히고 묶이면서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청키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가장 재미있는 점은 평소 버릴까 말까 고민하던 물건들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이번에는 쌀푸대를 이용해 청키 북에 포함 될 모듈을 만들어 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표지 정도로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쌀푸대를 자르고보니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접고 꿰매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재미있는 단면이 만들어졌다. 일반 종이로 만든 노트는 페이지를 많이 넣어야 두께가 생긴다. 반면 쌀푸대는 재료 자체에 두께와 구조가 있어 한 장 만으로도 원하는 두께가 만들어졌다. 청키북은 꼭 예쁜 종이로 만들 필..

청키북(Chunky Book)이란? 종이 재활용과 자유로운 제본

청키북(Chunky Book)은 해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수제책 형태 중 하나이다. 정크저널(Junk Journal), 아티스트북(Artist Book), 수제노트와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진다. 청키북(Chunky Book)은 두껍고 자유로운 형태의 책이다. 일반적인 노트나 저널처럼 같은 크기의 종이로 만들 필요도 없고, 완벽하게 재단할 필요도 없다. 페이지의 크기가 달라도 되고, 봉투가 들어가도 되고, 카드가 들어가도 된다. 두께가 달라져도 괜찮다. 나는 청키북을 예쁜 제본 기술로 접근하지 않는다.오래된 카드, 편지, 봉투, 사용하지 않는 도록, 다 쓰지 못한 공책, 버리기 애매한 종이들... 언젠가 버려질 수밖에 없는 종이들을 다시 꺼내어 한 권의 책으로 묶는 과정에 더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