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기록을 잘하는 사람이었을까, 못하는 사람이었을까.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는 웬만한 것은 외우는 습관이 있었다. 전화번호도 몇 번 듣고 외워두는 편이 적어놓는 것보다 편했다.
물론 다 외울 수는 없으니 메모도 했다.
부지불식간에 받은 전화번호를 아무 종이에나 적기도 하고, 아예 커다란 종이를 테이블에 깔아놓고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적기도 했다.
문구점에 가면 작은 노트에도 자꾸 손이 갔다.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사서 열심히 적는다.
문제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노트를 까맣게 잊고 또 다른 기록을 시작했다. 예전에 적어둔 전화번호를 발견하고도 이게 어디 번호인지 몰라 한참 들여다본 적도 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새 노트에 쓰기도 하고, 지난 다이어리의 빈 곳을 다시 쓰기도 하고, 낱장에 끄적여놓기도 한다. 기록은 여기저기 있는데 서로 따로 논다.
얼마 전 오래된 노트들을 정리하다가 예전에 쓰던 일기장도 펼쳐봤다.
예외가 없다.
앞의 몇 장은 제법 열심히 썼는데 어느 순간 뚝 끊겨 있다.
그런데 한참 뒤쪽에 다시 글씨가 보였다.
‘어? 여기에도 썼었나?’
펼쳐서 읽는데 내용은 분명 내 얘기 같다.
그런데 글씨가 다르다.
뭐지?
찬찬히 다시 읽어보고서야 알았다.
작은딸이었다.
내가 쓰다 만 노트를 가져다가 어느 날부터 자기 일기장으로 쓰고 있었던 거다.
아니, 왜 내 일기장에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고 같이 웃었다.
글씨가 아니었으면 한참 더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그 아이가 적어놓은 이야기와 내가 적어놓은 이야기가 어쩜 그렇게 비슷한지.
생각해보면 나는 기록을 그만둔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다만 한곳에서 오래 하지 못했다.
노트 하나를 끝내고 다음 노트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쓰다가 멈추고 잊어버리고 다른 곳에서 또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내게 남은 것은 완성된 기록 몇 권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진 수많은 기록이다.



나는 기록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꾸만 기록을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작심삼일의 저주를 벗어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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