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청키북 모듈은 여전히 오랜 시간 창고에 묵히던 상자들을 정리하며 만들어졌다.

상자를 하나씩 열다 보니 예전에 열었던 개인전 리플렛과 민화 작업 사진, 출력해 두었던 이미지들, 그리고 한동안 받아보던 작은 월간지가 함께 나왔다.
잊고 있었는데 종이들은 묵묵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아주 큰 그림을 그렸지만 지금은 사진 몇 장과 리플렛만이 그 시간을 대신하고 있다.


한 장을 접어 만든 리플렛을 다시 펼쳐 보았다. 그림보다 먼저 읽힌 것은 글이었다. 분명 내가 쓴 글인데도 처음 읽는 것처럼 낯설고 부끄럽다. 하지만 몇 줄 읽다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쓰던 언어와 바라보는 방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자라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출력해 두었던 종이들은 호랑이와 용 같은 영물의 눈과 무늬, 반복되는 패턴들로 채워져 있다. 확대된 인쇄망을 들여다보고, 작은 부분을 크게 바라보는 일이 그때의 내 관심사였던 모양이다.


지금은 모두 분실하고 파일로만 간신히 남은 민화 습작도 어쩌다 인화한 것이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습작들은 사라졌지만 작업하던 시간이 사진에 남아 있으니 한 번 눈 도장 찍으며 지나간다.


존경하는 무인산방지기의 무크지. 지금은 정년 퇴직을 하셨겠고, 어디선가 글과 실천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삶을 살고 계시리라.
격변의 시기를 살아내는 동안 제대로 답장도 못하고 받기만 했던 소식지들도 이번 작업에 함께 했다.

이렇게 여섯번째의 모듈이 만들어졌다.
나의 청키북은 새 종이로 만드는 책이 아니다.
오래된 작업실에서 시간을 건너온 종이들이 다시 한 권의 책으로 이어지는 흔적의 모음이다.
'청키북 (Chunky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청키북 005 - 접어 두었던 세상을 펼치다 (0) | 2026.06.23 |
|---|---|
| 청키북 004 - 작업실에서 살아남은 종이들 (0) | 2026.06.19 |
| 청키북 003 - 격동의 80년대를 기웃거렸던 흔적 (0) | 2026.06.16 |
| 청키 북 002 - 쌀 푸대, 버리지 말고 한 번 더 볼까? (0) | 2026.06.13 |
| 청키북(Chunky Book)이란? 종이 재활용과 자유로운 제본 (0) | 2026.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