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청키북 모듈은 복사지와 캔트지로 만들어졌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참고하기 위해 복사해 두었던 자료들, 언젠가 작업에 사용하려고 출력해 두었던 인쇄물들, 그리고 스케치북 사이에 끼어 있던 오래된 낙서들이다.



처음에는 그저 종이 뭉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씩 꺼내다 보니 작업실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종이들이었다.
어떤 것은 참고용으로 복사해 두고 사용하지 못한 자료였고, 어떤 것은 작업을 위해 출력해 두었다가 잊혀진 종이였다. 당시에는 꼭 필요할 것 같았지만 결국 다른 길로 가게 되면서 남겨진 흔적들이다.
당시에 나의 견문이 짧짧은 것도 있지만 책이 귀했다. 누군가 중국에 갔다가 사온거라 하면 한국에서는 못 구한다는 뜻으로 알고 주변의 몇명이 책을 빌려 복사하여 자료로 사용하였다. 또 누가 어딜 가서 전시회 사진을 찍어 왔다하면 인화해 달라기도 하고 확대 복사를 해서 자료로 쓰기도 했다. 아직 올컬러판은 청키북 재료로 쓰기에 망설여져서 일단은 B4, A3 자료들만 희생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 모듈의 뼈대는 조금 특별하다.
스케치북 속에서 작은 딸 아이가 어릴 때 그렸던 그림이 나왔다. 25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스케치북이다. 내가 작업 할 때마다 옆에서 더 열심히 스케치북을 채우던 아이다. 아이의 작업은 특별히 보관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스케치북 속에 남아 있었고, 이번 청키북을 만들면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복사지는 가볍고 얇은 반면 캔트지는 단단하기에 낡은 자료들이 페이지를 지탱하는 뼈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청키북을 만들다 보면 종이의 가치가 조금 달라진다.
새 종이보다 오래된 종이가 재미있고, 완성된 작품보다 작업의 흔적이 더 눈길을 끈다. 물감 자국, 출력물, 참고 자료, 낙서와 메모들까지 모두 새로운 페이지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작업실은 운명처럼 청키북의 재료창고가 될 것이었다는 상상을 해 본다.


이번 모듈을 만들며 다시 느낀 것은 버려지지 않은 종이들이 의외로 긴 시간을 견딘다는 점이다. 한때는 참고 자료였고, 한때는 아이의 그림이었지만 지금은 하나의 책을 이루는 표지가 되기도 하고 페이지가 된다
덕분에 청키북 004는 새로운 종이로 만든 책이 아니라, 작업실에서 살아남은 종이들이 다시 만난 작은 기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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